※ 『이방인』과 '부조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이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두 문장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화자는 자신의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 또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엄마의 죽음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무심한 어조로 서술되고 있다. 이로 인해 화자가 엄마의 죽음에 대하여 지금 어떤 심정인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일반인이라면 엄마의 죽음을 접했을 때 비통하고 애달픈 심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화자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부조리'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엄마가 죽었더라도 뫼르소 주변의 세상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그가 느끼기에 달라진 것이란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하며 자신의 삶을 즐긴다. 만약 특별한 사건만 없었더라면 뫼르소도 그냥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뫼르소가 살인 사건에 휘말림에 따라 세상 사람들은 그를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하고 뫼르소는 부조리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간과 비합리적이고 무심한 세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 및 갈등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이 왜 생겼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과 이유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원인이나 이유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모든 노력은 결국 헛수고로 끝날 뿐이다. 결국 비합리적인 세계를 합리적인 눈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데서부터 삶의 부조리는 싹튼다.
부조리를 의식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에 대하여 카뮈는 자살, 희망, 반항이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합리적인 나와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에만 부조리는 존재하는 것이니 내가 없어지면 즉, 내가 '자살'하면 부조리는 사라질 것이다. 만약 자살하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부정하고 그 자리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또는 존재했으면 하는 세계를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피안의 세계로서 이 삶에서는 구원받지 못했지만 이 삶 너머의 다른 세계에서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제로만 존재한다.
카뮈는 자살도 희망도 바람직한 선택지로 여기지 않는다. 이 두 선택지는 나 또는 세계 어느 한쪽을 완전히 삭제하려는 시도이기에 사실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 카뮈가 제시하는 세 번째 선택지인 '반항'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를 나의 살아있는 의식으로서 정면으로 마주보며 맞서 싸우는 것을 뜻한다. 부조리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대신 꿋꿋이 맞서서 반항하는 선택을 바람직한 선택지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뮈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얘기한 이유이다.
『이방인』은 결국 부조리를 깨달은 한 인간이 자신이 직면한 부조리에 대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꿋꿋하게 반항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다. 그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일반적이지 않고 매우 고지식하기에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화가 덜 되었고, 성숙하지 못한 인격을 지녔으며,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에, 남들 시선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안하무인한 살인자라 여기는 것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소시오패스와도 같은 바로 이 모습 때문에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진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뫼르소가 이러한 운명을 짊어지게 된 것은 저자인 카뮈가 그렇게 하도록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뮈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부조리 앞에서 반항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리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의도 때문에 세상 만사에는 무심하면서도 오직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뫼르소라는 인격을 만들어냈고, 바로 그러한 인격으로 인해 그를 부조리한 상황으로 내몰리게끔 했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반항하도록 그를 이끈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실제 세계였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분명 뫼르소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부조리에 직면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자살, 희망, 반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직면하고도 이를 외면해버릴 것이다. 부조리에 순응하고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조리에 타협하거나 협상하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나와 관계 없는 일이라 우기거나 어차피 세상은 그런 것이니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거나 나의 이득이나 손해를 거래로 해소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선택지다.
뫼르소와 같이 끝까지 반항하는 것을 선택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만 놓고 볼 때, 이는 고결한 순교자에 오를 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카뮈는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일말의 영웅적인 태도도 없이 진실을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인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소개한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뫼르소가 내린 최종 선택이다. 카뮈의 말처럼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정말 뫼르소야말로 '우리에게 어울릴 유일한 그리스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