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글쓰기
#2일차
- 제목: 난 괜찮지 않아. 너도 괜찮지 않아. 그러니 다 괜찮은 거야.
한국어에는 어순 변경이 자유롭고 주어나 목적어 같은 문장의 필수 성분을 문맥상 생략할 수 있으며 각종 조사와 어미가 무궁무진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는 표면적인 의미에만 신경써서는 안된다. 대화에서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표현하지 않고 감추거나 숨겨둔 의미는 없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 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감추거나 숨겨둔 것인지까지 고려해야 원만한 대화가 되는 것이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 '괜찮다'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서 '괜찮다'는 '별로 나쁘지 않고 보통 이상으로 좋다', '꺼려지거나 문제될 것이 없다', '별 탈이나 이상이 없다' 등으로 정의된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괜하다'의 부정형인 '괜하지 않다'로 해석하는 설, '관계하지 않다'에서 유래했다는 설, '괴이치 않다' 또는 '괘념치 않다' 등에서 왔다는 설 등 다양하다. 단어의 의미와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괜찮다'는 부정적인 상태를 부정함으로써 긍정적인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상 생활에서 '괜찮다'는 여러 쓰임새로 사용된다. 현재 상황이 좋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인데도 이를 감추거나 숨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괜찮아'라는 한 마디 속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물론 진짜 괜찮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을 수도 있지만,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괜찮다고 했을 수도 있다. '괜찮아'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괜찮(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리엇 러너의 '당신, 왜 사과하지 않나요?'를 읽다가 눈길이 가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난 괜찮지 않아. 너도 괜찮지 않아. 그러니 다 괜찮은 거야.'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글에서 따온 것인데 본문에서는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취지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부인-분노-협상-우울-수용)로 나누어 개념화한 인물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지금 괜찮은 상태인가, 아니면 괜찮지 않은 상태인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상태인가,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고 하는 상태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질문이 던지기는 쉬웠어도 답을 내리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무엇이 괜찮은 상태이고 괜찮지 않은 상태인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거나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고 하는 상태는 또 무엇인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하여 아직 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문장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위안을 받은 것 같다. 나도 괜찮지 않고 너도 괜찮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괜찮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세상에 진짜로 괜찮은 사람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텐데 그럼 결국 모두가 괜찮은 것 아니겠냐는 생각은 단순하지만 깊이 새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 실제 일어난 상황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에 만족하면서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 지금 괜찮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상황을 괜찮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구하며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지금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신의 현재 생각이 무엇인지부터 잘 깨닫고 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대책은 분명히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괜찮지 않은 상황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단순히 지금 괜찮지 않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니며 상황은 얼마든지 괜찮아질 수 있다. 괜찮지 않은 상황임을 인식할 수 있고, 이를 수용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개선해보려고 노력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현명한 삶을 위한 가장 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내가 괜찮지 않듯 내 주변의 사람들도 괜찮지 않을 것임을 내가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